한국 정치 지형에서 특정 이념적 스펙트럼으로 분류되는 정치 집단이나 인물들이 논란의 중심에 섰을 때, 대중이 기대하는 수준의 사과나 책임 인정보다는 다른 방식으로 대응하는 사례가 반복적으로 관찰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이러한 현상은 때로 ‘사과에 인색하다’거나 ‘오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비판으로 이어지며, 정치적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요인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이는 과연 특정 개인들의 성향 문제일까, 아니면 특정 정치적 환경이나 집단 역학, 더 나아가 이들이 추구하는 가치 체계와 관련된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이 글에서는 이러한 ‘사과 회피’ 또는 ‘오류 인정 지연’ 현상이 나타날 수 있는 몇 가지 잠재적 요인과 그 시스템적 배경을, 과거의 실제 사례들을 통해 분석해보고자 한다.
1. ‘대의명분’의 무게와 오류의 상대화: 이념적 정체성의 양날의 검
강한 이념적 정체성을 가진 정치 집단일수록 자신들이 추구하는 ‘대의명분’의 정당성에 대한 확신이 깊을 수 있다. 이러한 확신은 때때로 정책 추진 과정에서의 일부 오류나 부작용, 혹은 특정 발언으로 인한 논란을 ‘더 큰 선을 위한 불가피한 과정’ 혹은 ‘개혁을 향한 여정의 작은 흠결’ 정도로 상대화하려는 경향으로 이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과거 진보 진영 정부 시절 추진되었던 여러 ‘개혁 입법’ 과정이나 주요 정책들이 사회적으로 큰 논란을 야기했을 때, 정부와 여당은 종종 “역사적 당위성”이나 “촛불 정신의 구현”과 같은 거시적인 명분을 내세우며 비판 여론에 맞섰다. 검찰개혁 추진 과정에서 불거졌던 모 법무부 장관 일가에 대한 논란이 대표적이다. 당시 진보 진영의 핵심 지지층과 일부 정치인들은 개별 의혹의 사실관계 규명보다는 ‘검찰개혁이라는 대의를 수호해야 한다’는 논리를 우선시하며, 쏟아지는 비판을 ‘개혁 저지 세력의 공세’로 규정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별 사안에 대한 ‘오류 인정’이나 ‘사과’는 곧 자신들이 추구하는 거대한 이념적 목표 자체를 훼손하거나, 반대 세력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여 ‘대의’의 진전을 가로막는다고 인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이러한 태도가 건설적인 비판 수용과 정책 개선의 기회를 차단하고, 결과적으로 더 큰 사회적 갈등을 야기할 수 있다는 점이다.
2. ‘우리 편’ 논리와 지지층 결속의 정치공학: 사과의 비용과 편익
현대 정치는 점차 양극화되고 있으며, 핵심 지지층의 견고한 지지가 정치인의 생존과 영향력 유지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논란이 발생했을 때 취하는 태도는 중도층 확장이라는 전통적인 목표보다는 핵심 지지층의 이탈 방지 및 결속 강화에 더 초점이 맞춰질 수 있다. ‘사과’라는 행위는 때로 지지층에게 ‘굴복’이나 ‘약함’의 이미지로 비춰질 수 있으며, 이는 지지층의 실망과 이반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정치적 계산이 작용할 수 있다.
부동산 가격 폭등과 정책 실패 논란이 거셌던 지난 정부 말기, 당시 정부와 여당 인사들은 정책 실패를 인정하고 사과하기보다는 “투기 세력과의 전쟁”, “전 세계적인 유동성 증가” 등 외부 요인을 강조하거나, 심지어 “우리 정부만큼 부동산에 진심인 정부는 없었다”며 정책의 선의를 내세우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정책 실패에 대한 비판을 ‘정부 흔들기’로 규정하고, 핵심 지지층을 향해 “우리는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어려움 속에서도 개혁을 완수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발신함으로써 내부 결속을 다지려는 전략으로 해석될 수 있다. 사과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불확실한 중도층의 지지보다는, 비판 세력과의 대립각을 세움으로써 얻을 수 있는 확실한 지지층의 결집을 우선시하는 정치공학적 판단이 ‘사과 없는 정치’를 강화하는 한 요인이 되는 것이다.
3. 미디어 환경 변화와 ‘프레임 전쟁’: 한번 찍힌 낙인의 무게
정보 유통 속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지고, 소셜미디어를 통한 직접 소통이 일상화된 현대 미디어 환경 또한 정치인의 사과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다. 한번 논란이 된 사안에 대해 사과를 할 경우, 그 사과 자체가 또 다른 공격의 소재가 되거나, 반대 진영에 의해 ‘모든 것을 인정한 것’으로 왜곡되어 무한정 확산될 위험이 상존한다. 이는 이른바 ‘프레임 전쟁’에서 결정적인 패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인식을 낳는다.
과거 일부 정치인들이나 공직자들이 논란이 된 발언이나 행동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는 식의 ‘유감 표명’에 그치거나,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드려 송구하다”면서도 구체적인 잘못은 인정하지 않는 듯한 모습을 보였던 사례들이 이를 방증한다. 이는 명확한 사과가 가져올 정치적 부담을 회피하면서도, 비판 여론을 일부 무마하려는 전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적 사과’는 대중에게 진정성 없는 모습으로 비춰져 오히려 더 큰 반감을 사기도 한다. “사과는 곧 모든 것을 내주는 것”이라는 인식이 정치권 전반에 퍼져있다면, 이는 특정 진영만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4. 조직 문화와 리더십: 내부 비판 시스템의 부재 혹은 오작동
정당이나 특정 정치 세력 내부의 조직 문화 또한 오류 인정과 사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만약 조직 내부에 건설적인 비판이나 다양한 의견 개진이 활발하지 못하고, 리더나 핵심 그룹의 의사결정에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운 경직된 문화가 존재한다면, 외부로부터 문제가 제기되기 전까지 내부적으로 오류를 인지하고 수정할 기회를 놓치기 쉽다.
지난 2021년 재보궐선거 당시 민주당의 패배 이후, 당내에서는 부동산 정책, 젠더 갈등 등 다양한 문제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나왔으나, 이것이 실질적인 정책 변화나 책임 있는 사과로 이어지기보다는 내부 권력 투쟁의 소재로 활용되거나 단기적인 수습책에 그쳤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특정 계파나 리더 중심의 의사결정 구조가 강화될수록, 내부의 다양한 목소리나 비판적 의견은 억눌리기 쉽고, 결과적으로 외부의 지적이 있고 나서야 문제가 공론화되는 경향을 낳을 수 있다. “왜 미리 내부에서 걸러내지 못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그럴 수 있는 시스템이 없었거나 작동하지 않았다”는 답변이 돌아온다면, 이는 심각한 구조적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