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전하는 10만 원의 착시: ‘호텔 예약금 순환론’은 경제 성장을 말하는가?

최근 특정 정치인을 통해 회자되며 주목받은 ‘호텔 예약금 경제학’이라는 주장이 있다. 골자는 이렇다: 한 여행객이 호텔에 10만 원의 예약금을 지불한다. 호텔 주인은 이 돈으로 재단사에게 옷을 맞추고, 재단사는 그 돈으로 정육점에서 고기를 사고, 정육점 주인은 다시 그 돈을 들고 호텔에 숙박 예약을 하며 예약금을 낸다. 이렇게 돈이 한 바퀴 돌아 다시 호텔로 돌아온 시점에서, 최초의 여행객이 예약을 취소해 10만 원을 환불받더라도, 그사이 돈이 지역 내에서 여러 번 회전했으므로 경제가 활성화되었다는 논리다.
이 이야기는 언뜻 들으면 그럴듯하다. 돈이 도는 것, 즉 유통 속도가 빨라지는 것은 경제 활동의 한 단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호텔 예약금 순환론’이 과연 실질적인 경제 성장이나 활성화를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몇 가지 심각한 질문과 검토가 필요하다. 단순한 자금의 일시적 회전이 경제의 본질적 가치 창출과 동일시될 수 있을까

 

1. ‘가치 창출 없는’ 거래의 연속: 최종 소비의 부재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이 모델이 최종적인 ‘가치 교환’ 또는 ‘실질 소비’의 부재를 간과한다는 점이다. 경제 활동의 핵심은 단순히 돈이 오가는 것을 넘어, 재화나 서비스가 생산되고 소비되는 과정에서 가치가 창출되는 데 있다. 제시된 시나리오에서, 호텔 숙박이라는 최초의 서비스 계약은 결국 취소되었다. 이는 10만 원에 상응하는 실질적인 서비스 제공과 소비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호텔 주인이 재단사에게, 재단사가 정육점 주인에게 돈을 지불하는 행위들은 일련의 채무-채권 관계의 연쇄 이동으로 볼 수 있다. 각 단계에서 일시적인 유동성 공급 효과는 있었을지 모르나, 만약 모든 거래가 최초의 ‘환불될 수 있는 예약금’에 의존하고 있다면, 그 고리 중 하나가 끊어지거나 최초의 자금이 회수될 경우 연쇄적인 지급 불능 상태에 빠질 위험을 내포한다. 호텔 예약이 취소되어 10만 원이 환불되었다는 것은, 이 돈의 흐름을 가능하게 했던 최초의 구매력이 실체 없이 사라졌음을 뜻한다. 돈이 몇 바퀴 돌았든, 최종적으로 새로운 부가가치를 만들어내거나 실질적인 소비로 이어지지 못했다면, 이는 마치 실탄 없는 총알 돌리기와 유사하다. 일시적으로 시장에 돈이 도는 것처럼 보였을지라도, 실질적인 생산력 증대나 후생 증가는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2. 거래 비용과 기회비용의 간과
‘호텔 예약금 순환론’은 각 거래 단계에서 발생하는 명시적, 암묵적 거래 비용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돈이 오갈 때마다 시간, 노력, 경우에 따라서는 수수료 등의 비용이 발생한다. 만약 최초의 예약금이 신용카드 결제 후 취소되었다면, 호텔은 카드 수수료를 부담했을 수 있다. 각 상점 주인들 역시 돈을 받고 물건이나 서비스를 (외상 형태로) 내어주는 과정에서 불확실성을 감수해야 한다. 이러한 미시적인 마찰 비용들은 총합이 0이 아닌 이상, 실질적인 가치 창출이 없는 자금 회전 과정에서는 순손실로 작용할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기회비용이다. 호텔 주인이 받은 10만 원이 ‘언제든 환불될 수 있는 돈’이라는 사실을 모든 거래 당사자가 명확히 인지하고 있다면, 그들의 경제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재단사는 그 돈으로 새로운 원단을 선뜻 구매하기보다는 당장의 외상값을 막는 데 소극적으로 사용하거나, 정육점 주인 역시 불확실한 수입에 기대어 과감한 투자를 하기 어려울 것이다. “어차피 사라질 돈일지도 모른다”는 인식은 경제 주체들의 미래 기대 수익을 낮추고, 이는 투자 및 생산 활동 위축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는 곧 더 생산적인 곳에 사용될 수 있었던 자금과 시간, 그리고 경제 주체들의 기업가 정신이 비효율적으로 낭비되었음을 의미한다.
3. 화폐 유통 속도와 실질 경제 성장의 괴리
화폐 유통 속도(Velocity of Money)가 증가하는 것은 경제가 활발하다는 하나의 지표가 될 수는 있다. 그러나 화폐 유통 속도의 증가는 반드시 실질적인 경제 성장, 즉 재화와 서비스의 총생산량(Q) 증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경제학의 기본 원리인 화폐수량설(MV=PQ, M: 통화량, V: 유통 속도, P: 물가 수준, Q: 실질 생산량)을 상기해 보자. ‘호텔 예약금 순환론’에서 M(10만 원)은 일정하고, V는 일시적으로 증가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Q(호텔 숙박 서비스)가 발생하지 않고 예약금이 환불되었다면, 이 과정에서 P나 Q에 미친 긍정적 영향은 극히 제한적이거나 일시적 환상에 불과했을 가능성이 높다.
단순히 돈이 빨리 도는 현상 자체를 경제 성장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그 회전을 통해 새로운 가치가 창출되고, 생산이 늘어나며, 고용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는지 여부다. 만약 돈만 돌고 실질적인 생산과 소비가 없다면, 이는 거품 경제의 초기 징후이거나, 극단적으로는 하이퍼인플레이션 상황에서 돈의 가치가 급락하여 사람들이 최대한 빨리 실물로 바꾸려는 현상과도 유사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사례는 인플레이션과는 거리가 멀지만, 돈의 회전 자체가 능사가 아님을 보여준다).
4. 기대 심리와 신뢰의 문제: 지속 불가능한 모델
만약 이러한 ‘예약금 돌려막기’가 경제의 일반적인 작동 방식이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경제 주체들은 거래의 불확실성에 직면하게 되고, 시장에 대한 신뢰는 저하될 것이다. 호텔 주인은 예약금을 받을 때마다 “이 손님도 취소하지 않을까?”라는 불안감을 가질 것이고, 재단사나 정육점 주인 역시 외상 거래에 극도로 신중해질 것이다. 이는 결국 신용 경색을 유발하고 경제 시스템 전반의 효율성을 떨어뜨린다.
경제는 사람들의 기대와 신뢰를 바탕으로 움직인다.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기대가 있을 때 소비와 투자가 활발해지고, 거래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있을 때 복잡한 계약 관계가 원활하게 이루어진다. ‘언제든 취소될 수 있는 돈’에 기반한 경제 순환은 이러한 기대와 신뢰를 근본적으로 훼손할 수 있다. 이는 단기적인 유동성 공급 효과를 훨씬 뛰어넘는 장기적인 부정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위험한 발상이다.
결론: 단순한 일화 너머의 경제적 실체를 직시해야
‘호텔 예약금 경제학’ 이야기는 돈이 도는 모습 그 자체에 현혹되어 경제의 본질을 오해하게 만들 수 있는 전형적인 사례다. 물론, 유동성 공급이 일시적으로 경색된 시장에 숨통을 트여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지속 가능한 경제 성장이나 실질적인 가치 창출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최종 소비가 부재하고, 거래 비용과 기회비용이 간과되며, 시장의 신뢰를 저해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경제 정책이나 담론은 한두 가지 단순한 일화나 직관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보다 면밀한 데이터 분석, 경제 이론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 그리고 발생 가능한 다양한 파급 효과에 대한 냉철한 예측을 바탕으로 수립되고 평가되어야 한다. ‘돈이 돌면 경제가 산다’는 명제는 그 자체로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어떤 돈이’, ‘어떻게 돌아서’, ‘무엇을 남기는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이 생략된다면, 이는 공허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화려한 수사나 단순 논리 이면에 숨겨진 경제의 복잡성과 실체를 직시할 필요가 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