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AI 시대다. 주요국들은 AI 기술 패권을 국가의 명운을 건 과제로 인식하고 천문학적인 투자를 쏟아붓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최근 모 대선 후보를 중심으로 한 정치권이 언급하는 ‘국가 주도 AI 전략’은 그 규모와 방식 면에서 연일 화제의 중심에 서 있다. 정부가 직접 대규모 AI 연구개발 단지를 조성하고, 특정 AI 분야를 ‘국가 전략 기술’로 선정하여 집중 육성하며, 공공 데이터를 전면 개방하여 AI 개발에 활용하겠다는 청사진은 “한국형 AI 강국 도약”이라는 야심 찬 목표를 담고 있다.
이러한 국가적 차원의 AI 육성 의지 자체를 폄훼할 생각은 없다. AI 기술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며, 초기 시장 형성에 있어 정부의 마중물 역할 또한 일정 부분 필요하다는 점에 동의한다. 그러나 문제는 ‘방식’이다. 과연 정부가 밑그림을 그리고, 예산을 투입하며, 구체적인 연구개발 방향까지 제시하는 하향식(Top-down) 국가 주도 방식이, 본질적으로 탈중앙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속성을 지닌 AI 기술 발전의 최적 경로라고 할 수 있을까? 거대한 청사진 이면에 숨겨진 비효율과 잠재적 위험 요소들을 면밀히 검토해야 할 시점이다.
1. AI 발전 속도와 관료주의의 ‘미스매치’
AI 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으며, 그 변화의 속도는 기존 산업혁명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다. 챗GPT와 같은 생성형 AI의 등장은 불과 1~2년 만에 전 세계 산업 지형을 바꾸어 놓고 있다. 이러한 분야에서 성공의 핵심은 신속한 의사결정, 과감한 실험과 실패의 용인, 그리고 유연한 조직 문화다.
그러나 정부 주도 사업의 일반적인 특성은 어떠한가? 다층적인 보고 체계, 복잡한 예산 집행 절차, 경직된 조직 운영, 그리고 단기적 성과에 대한 압박은 관료주의 시스템의 고질적인 병폐로 지적된다. 과연 이러한 시스템이 AI 기술의 역동성을 제대로 담아낼 수 있을까? 특정 기술이나 연구 과제가 정부의 ‘선택’을 받는 순간, 이미 글로벌 시장에서는 한물간 기술로 전락해 있을 가능성은 없는가? “AI 발전 속도는 시속 300km인데, 정부 시스템은 아직도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마차 같다”는 한 AI 스타트업 대표의 자조 섞인 비유는 결코 과장이 아닐 수 있다.
2. ‘선택과 집중’의 함정: 정부는 미래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가?
‘국가 주도 AI 혁신 전략’의 핵심 중 하나는 정부가 유망 AI 분야를 선정하여 집중적으로 자원을 투입하는 ‘선택과 집중’이다. 그러나 정부가 과연 어떤 기술이나 서비스가 미래에 성공할지 정확히 예측하고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된다.
과거 정부 주도의 수많은 기술 육성책들이 ‘장밋빛 전망’으로 시작했지만, 시장의 외면을 받거나 중복 투자로 예산만 낭비한 채 사라져간 사례는 부지기수다. 이는 정부의 예측 능력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본질적으로 미래 기술의 향방은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AI 분야는 더욱 그렇다. 현재 각광받는 딥러닝 기술도 수십 년간의 비주류 연구 끝에 빛을 본 것이며, 다음 세대의 AI 패러다임은 현재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곳에서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
정부가 특정 분야나 소수의 대형 프로젝트에 자원을 몰아줄 경우, 오히려 다양한 분야에서의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시도들이 위축될 수 있다. 이는 마치 몇몇 거목만 남기고 다양한 풀과 작은 나무들이 자라날 수 없는 숲을 만드는 것과 같다. 진정한 AI 생태계는 다양한 아이디어가 자유롭게 경쟁하고 예기치 않은 성공과 실패가 교차하는 과정에서 건강하게 조성될 수 있다. 정부의 역할은 특정 ‘승자’를 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도전자’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공정한 운동장을 만드는 데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
3. 민간의 창의성 위축과 시장 왜곡 가능성
AI 기술 발전의 핵심 동력은 결국 민간 기업의 투자와 연구개발, 그리고 우수한 인재들의 창의성이다. 그러나 정부가 AI 시장의 ‘큰 손’으로 직접 나서 과도하게 개입할 경우, 오히려 민간의 자율성과 혁신 동기를 저해하고 시장을 왜곡할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어, 정부가 특정 AI 응용 서비스 개발에 막대한 예산을 투입한다면, 유사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민간 기업들은 정부 지원을 받는 업체와의 불공정 경쟁에 직면하게 된다. 이는 자칫 민간 투자를 위축시키고, 기업들이 자체적인 기술 개발보다는 정부 과제 수주에만 매달리게 만드는 ‘보조금 의존형’ 생태계를 고착화시킬 수 있다. “정부가 물고기를 직접 잡아주는 방식은 결국 고기 잡는 법을 잊게 만든다”는 격언은 AI 산업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또한, 정부 주도로 수집되고 가공된 ‘공공 AI 데이터’가 특정 기준이나 편향성을 가질 경우, 이를 활용하는 AI 모델 역시 왜곡된 결과를 도출할 위험이 있다. 이는 공정성 시비를 넘어 심각한 사회적 갈등을 야기할 수 있다. AI의 윤리적 문제와 데이터 거버넌스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 없이, 국가 주도의 속도전만 강조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4. AI 인재 양성: ‘양’이 아닌 ‘질’과 ‘환경’의 문제
정부의 AI 전략에는 어김없이 ‘AI 인재 00만 명 양성’과 같은 목표가 포함된다. 그러나 AI 분야의 경쟁력은 단순히 배출되는 인력의 숫자로만 결정되지 않는다. 핵심은 소수의 창의적인 천재와 그들이 자유롭게 연구하고 협력할 수 있는 환경이다.
정부 주도의 획일화된 교육 프로그램이나 단기 양성 과정이 과연 세계적 수준의 AI 인재를 길러낼 수 있을까? 오히려 대학과 연구기관의 자율성을 존중하고, 기초 과학에 대한 장기적인 투자를 확대하며, 실패를 용인하는 연구 문화를 조성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또한, 국내의 우수 인재들이 해외로 유출되는 것을 막고, 해외의 뛰어난 연구자들을 유치하기 위한 파격적인 지원과 개방적인 환경 조성이 시급하다. 단순한 ‘숫자 불리기’ 식의 인재 양성책은 공허한 구호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